사람이 죽는 것을 처음 보는 건 몇 년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였다.
친척들이 모두 우리 집에 와 있었다. 좁은 방에 서른명이 모여 침대에 누워 계신 할머니를 지켜 보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꼼짝도 않고 조용히 숨만 쉬고 계셨다. 느린 숨에 가슴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새 호흡이 가빠지더니 입으로 숨을 들이쉬기 시작하셨다. 가슴이 저릴 것 같을 만큼 크게. 그때 문 쪽에 서 있던 사촌 오빠가 울먹이며 외쳤다.
“할머니!”
그러자 다들 하나씩 울기 시작했으며, 순간 공기가 울음으로 가득 찼다. 무슨 교향악이라도 하듯 누가 누구인지 구분 못할 정도로 수많은 곡성들이 뒤섞여 방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지더니 더 이상 할머니의 숨소리가 안 들렸다. 그 혼돈 속 어디선가부터 작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야, 소릴 내어 울어! 할머니께 들리게.”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앞에 앉으신 둘째 고모 어깨 너머로 할머니를 건너다보았다. 슬프셔서인지 아프셔서인지 눈가에 눈물이 맺쳤더랬다.
무서웠다. 이렇게 힘들어하고 아파하시는데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고 보고만 있을 밖에 없다는 것. 숨이 끊어질 때까지. 손이 차가워지고 뻣뻣해질 때까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 할머니는 고모 집에서 넘어져서 크게 다치셨다.
고모 집은 바로 우리 집 아래층이었다. 이사가신 지 꽤 오래 되었고 세를 내놓은 상태였는데 바빠서 직접 관리할 시간이 없으시기 때문에 할머니가 대신 집을 돌보기로 하셨다. 주로 월세를 거두고 수도료와 전기료를 내는 정도였지만 가끔 직접 내려가서 집 상태를 확인하기도 하셨다.
그 날은 나는 동생들과 외출했고, 집에 할머니와 부모님만 계셨다. 둘째 동생의 생일을 앞두고 있었는데 미리 축하해 주려고 내가 식당을 예약했다. 원래 할머니와 부모님도 같이 모시고 갈 계획이었는데 아버지가 그 날 따라 몸이 편찮으셔서 그냥 집에 있고 싶다 하셨고, 어머니와 할머니도 같이 집에 남기로 하셨다.
집에 돌아왔을 때 부모님만 계시길래 할머니가 어디 가셨는지 물어봤더니 뭘 좀 확인해야 한다고 고모 집에 내려가셨단다. 이미 두세 시간이 되었으니 꽤 오래 지난 것이었다. 걱정이 되어 찾으러 나가려던 차에 아래층에 사는 이웃 아저씨가 허겁지겁 달려와 할머니가 넘어져서 크게 다치셨다고 하셨다.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가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할머니의 피였다. 할머니의 머리에서 흘러 나와 바닥에 고여 있고, 넘어진 곳으로 추정되었던 화장실 문앞을 향해 빨간 곡선을 그렸다. 벽에 찍힌 피 손자국을 보니 화장실 문앞에서 넘어져 머리가 어디에다 부딪힌 뒤 혼자 벽을 짚으며 걷다 못해 결국 기어서 간신히 정문까지 온 것 같았다.
병원에 가는 길에 정신을 잃으실까 봐 나는 할머니 눈이 감기실 때마다 어깨를 토닥이며 깨우려 했다.
“잠드시면 안 돼요, 할머니.”
이 말만 반복하며 혹시라도 이대로 가실까 봐 마음의 준비를 하려고 했다. 그러다 그런 나의 모습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보다 죄스러운 게 더 있었다. 부모님과 할머니를 집에 두고 동생들과 나갔던 것. 같이 가자고 좀 더 설득해 볼 걸 그랬나. 아니면 졸라서 억지로 데려가기라도 하든가.
그러면 이 모든 일이 안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 날은 할머니가 기적처럼 살아남으셨다. 병원에서 머리에 난 상처를 꿰매 주셨고, 그 외에 큰 문제가 없다고 해서 바로 집에 돌아오셨다. 이주 정도 지나서 이제 긴장을 놓아도 되나 싶었는데 잘 회복된 줄 알았던 상처가 곪아서 다시 입원하셨고, 바이러스가 뇌까지 퍼져 말조차도 제대로 못하시게 되었다. 그렇게 또 이주 정도 버터셨다가 결국 다치신 지 할 단 만에 돌아가셨다.
장례식은 할머니가 생전에 당부하셨던 것처럼 큰 아버지 댁에서 차리기로 했고, 도교사를 불러 삼일 연속으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독경을 하고 지전을 살랐다. 하루종일 송경을 하는 게 이웃들에게 폐가 될 것 같아 집집마다 돈까지 갖다 드렸다.
장례식을 성대하게 차리는 건 할머니의 소원이었다. 어렸을 때 자기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할아버지가 온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역대 성대한 장례식을 차려준 것을 보고 나중에 본인이 돌아갈 때도 꼭 저렇게 해야 한다 다짐하셨단다. 자식들이 돈을 아끼려고 대충 할까 봐 장례식에 쓸 돈까지 스스로 모으셨다.
장례식 첫날에는 나는 의외로 마음이 담담했다. 지금 되돌아보니 실감이 안 나서 그렇게 침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분향하고 절하는 동안 잠깐 울긴 했지만, 슬퍼서 울었다기보단 장례식장 분위기에 휩싸여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마음이 텅 빈 상태였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절하면서 망자의 넋을 달래는 말을 해야 한다는데 할 말이 없어 그저 향을 들고 할머니의 영정을 우두커니 올려다 보았다. 찍은 지 몇 년 된 사진이었다. 나중에 영정으로 쓰려고 사진관에 가서 찍으셨다. 영정까지 스스로 챙기셨다니 참말로 더할 나위 없이 철저하신 분이구나.
향을 향로에 꽂아 놓은 뒤 할머니를 뵈러 갔다. 왠지 두려워서 한참 동안 관을 차마 못 열다가, 마음을 겨우 다잡고 열어 보니 낯선 얼굴이 있었다. 할머니 같지 않았다. 아니, 사람 같지도 않았다. 양쪽 볼이 움푹하고 칙칙해진 피부가 두꺼운 화장 밑에 밀랍을 바른 것처럼 반들반들했다.
어떻게 어제 봤던 사람이 저렇게 금새 달라질 수 있을까. 벌써 할머니 얼굴을 잊었나 싶었다.
그렇게 한참 관 옆에 서서 할머니에게 얘기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건 얘기하는 동안 느꼈던 불편함이었다.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그 기분을 견디지 못해 그냥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 후 몇 시간 동안 사촌들과 번갈아면서 찾아오는 조문객들에게 절을 했다. 오는 사람마다 울고 있거나 눈시울이 붉어서 내가 괜히 계면쩍었다. 나도 울어야 할텐데. 이렇게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린 것을 보시면 속상하시고 화나실 텐데, 저 하늘 위에서. 아니다. 도교에서는 죽은 사람은 일단 저승에 가야 된다. 황천길을 디디고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에게 선고를 받아야 될 테니 그쯤에는 아마 황천의 강을 건너시는 중이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나를 싫어하셨다. 뭘 해도 못마땅하셨고 이웃사람들과 친척들에게 내 뒷담화를 하시곤 했다. 물론 그냥 대놓고 나무라실 때도 있었다. 한 번은 고모가 할머니를 보러 집에 오셨는데 내가 방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할머니가 먼저 이 말을 뱉으셨다.
“이 년 봐라. 이런 게으르고 쓸데없는 년을 키워 봐야 쌀만 아깝지.”
고모가 나를 힐끗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셨다.
“아유 어머니, 애가 듣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싸가지 없는 년은 기 좀 꺾어야 쪽팔릴 줄 알지. 지 에비 에미가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저 꼴이 된 거 아니야. 공부 좀 잘하면 다야? 어휴, 꼴보기 싫다.”
나는 늘 그렇듯이 머리를 숙인 채 억지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듣기만 했다. 할머니가 화를 다 풀고 화제를 돌리실 때까지 벌 서듯이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었다.
또 한 번은 화장실에 있었는데 거실에 있는 전화가 울리는 소리와 할머니가 나에게 전화 받으라는 게 들려왔다. 최대한 빨리 손을 씻고 나갔는데 이미 전화가 끊겼다. 다시 걸어주겠지 싶었는데 할머니가 씨근덕거리며 부엌에서 나오셨다. 그러곤 손을 들어 내 뺨을 모질게 한 대 쳤다.
“받으라는데 왜 안 받았어!”
“화… 화장실에 있었어요…”
원래부터 성격이 거칠고 화를 잘 내시는 편이었던 게 사실이지만, 나를 유독히 싫어하셨던 것 같다. 이유는 모르겠다. 나는 조용한 아이였다. 어른들의 말을 잘 듣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어른에게 대들기는 커녕 학교에서 애들에게 왕따를 몇 년 동안 당했어도 조용히 참기만 했다. 혼나도 말대꾸 하나 없이 다 조용히 받아들였던 애를 왜 그렇게 싫어하셨을까.
그 정답은 이제 영영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그러나 고민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게 그저 의미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도저히 이 질문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 같다. 왜 나를 싫어하셨을까. 왜 나만 미워하고 때리셨을까.
첫 날 빼고 장례식 내내 화났었다. 웃으면서 할머니 생전 이야기를 했던 사촌들에게도 화났고, 이제 그만 좀 울어라는 어른들에게도 화났다. 당신들이 뭘 안다고 그래, 하고 생각하면서. 평소에 찾아뵈러 오지도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신경쓰는 척을 해?
그러나 무엇보다 할머니가 제일 원망스러웠다. 그동안 나를 이유 없이 싫어했던 것도 그렇고, 아무 예고도 없이 그렇게 떠나버리는 것도.
그렇게 삼일 동안 장례식을 진행한 뒤, 할머니를 수도 근교에 있는 묘지에 안장했다. 그 날의 모든 것을 지금도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날씨가 끔찍하게 더웠고, 내리좼던 햇빛이 살갗이 볏겨질 것 같을 정도로 따가웠다. 도사님의 안내로 여러 복잡한 의식을 마치고 하관하는 곳에 모였다. 관이 이미 땅에 놓여 있었다. 그럴 리가 없었지만 왠지 큰아버지 댁에서 봤을 때보다 작아진 것 같았다.
믿기지 않았다. 그 길쭉한 나무 상자 안에 사람이 들어 있다는 것. 그게 할머니라는 것.
도사님이 이제 집에 갈 때가 되었다며 땅에 있는 흙 한 줌씩 주워 관 위에다 던지고 가라고 하셨다. 그러더니 다들 드디어 끝나나 해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점심 뭐 먹냐, 배고파 하면서 흙을 주워 던지고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주차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든 게 이상했다. 할머니가 땅에 있는 것도, 할머니를 거기 두고 그냥 가는 것도. 그리고 이해가 안 되었다. 다들 어떻게 저리 아무렇지도 않게 갈 수 있는지.
어느새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이제 흙에 반쯤 가려진 할머니의 관에다 흙 한 줌 더 얹혀 놓고는 관을 바라보았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0여 년 동안 같은 집에서 살고 매일 보았던 그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없구나.
“언니, 가자. 도사님이 기다리시잖아.”
나는 할머니가 누워 계시는 그 구멍에 등을 지고 서서히 나아갔다.
할머니가 항상 나를 싫어하셨던 것은 아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할머니가 다소 성미가 욱하고 급하긴 했지만 다정한 면도 있었다. 부모님은 둘 다 일해야 하셔서 할머니가 대신 나를 돌봐 주셨다. 날마다 나와 같이 등교한 친구 집앞까지 데려다 주셨고, 밥도 많이 해 주셨다. 특히 볶음밥을 기가 막히게 잘하셨다.
초등학교 때 숙제 기록책자라는 게 있었는데 아이들이 숙제를 다 했는지 체크하기 위한 거였다. 그날의 숙제를 책자에다 적어두고, 다 하고 나면 부모님이나 보호자에게 서명해 달라고 하면 되었다. 나는 항상 할머니가 해 주셨다. 다른 애들 부모님이 해 주신 것과 달리 평소에 흔히 볼 수 있는 ‘싸인’이 아닌 진정한 ‘서명’이었다. 이름을 직접 쓰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학교를 다니신 적이 없었다. 2차 세계 대전과 일제시기의 암영 속에서 자라셨고, 남자로 태어났으면은 모르지만 여자라서 교육을 받을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쓰이는 한자와 자기의 이름을 익히려고 하셨다.
“나도 학교를 다녔더라면 이런 거 금방 배우지. 뭐 대수로운 일이냐”라며 내 책자에다 이 세 글자를 꼬박꼬박 쓰셨다. 오매춘. 매화 매(梅)에 봄 춘(春). 온 힘을 다해 종이에다 긁어 놓은 것처럼 획마다 굳세었다.
“학교 안 다녔어도 글자 쓸 줄 아는 사람 몇이 되겠어? 가서 니 친구들한테 물어봐, 너네 할머니는 글자를 아냐고.” 나에게 책자를 건네며 자랑하는 미소로 이렇게 말씀하곤 하셨다.
나를 돌봐 주시는 동안 장사도 하셨다. 바느질을 유독 잘하셔서 이불, 커튼 같은 것을 종종 만들어 시장에서 파셨다. 같이 점심을 먹은 뒤 할머니는 재봉기 앞에 앉아서 일하시고, 나는 재봉기가 덜컹덜컹 도는 소리를 들으면서 숙제를 했다. 나는 그 순간들이 좋았다. 마음이 평화롭고 편안했다.
가끔 일하다가 나 보고 실을 꿰 달라고 하기도 하셨다. “얘야, 요거 좀 꿰 주라. 할매가 눈이 좋지 않잖니”라며 실에 침을 바르고 나에게 건네 주셨다. 할머니가 성격이 급하신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늘 빨리 해 드리려고 했지만, 너무 급하게 꿰다 보니 실이 엉키고 말 때도 있었다.
“어휴, 이것도 못하냐. 됐다, 됐어. 이리 주라.”
나에게 할머니에 대한 행복한 추억은 이게 전부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에 마음이 평화로워 보이셨다. 집에 들어온 지 4주 만에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고, 더 이상 알 수 없는 통증으로 끙끙거리지 않으셨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너무나 뻔한 일인데 그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곧 돌아가실 거라는 것을.
세균감염으로 입원하셨던 할머니가 병원에 고작 일주 밖에 안 계셨지만, 그 사이 몸이 너무 많이 약해져서 집에 돌아왔을 때는 혼자 걷지 못하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계실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누가 붙들어주지 않으면 화장실에도 못 가고, 밤엔 기저귀를 입고 주무셔야 했다.
항상 강하셨고 뭐든지 혼자 하려고 하셨던 할머니께는 얼마나 큰 굴욕이었을까. 그래서 자꾸 그렇게 몸부림치며 기저귀를 떼서 던졌고, 천장을 보고 부르짖으셨던가.
나는 할머니의 그런 모습이 짜증나고 불쾌했다. 밤새도록 그러시기에 자꾸 하던 일을 멈추고 할머니를 간호할 엄마를 도와 줘야 했었는데, 기저귀를 갈아 드리는 동안 내심 귀찮았다. 좀만 참으면 금방 나으실 건데 왜 이렇게 얌전하지 못하시지, 하고 말이다. 귀찮은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쩌면 다 할머니께 들켰을지도 모른다. 원래 사람이 아플 때 더 예민해지니까.
그래서 후회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와서 방에서 한참 울었다. 그동안 내가 한 행동과 생각들이 수치스러워서, 그런 죄를 지은 내가 너무 역겨워서 가족에게 들키지 않게 불을 끄고 소리를 죽여 울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아프셨는데 어떻게 일에만 몰두했을까. 어떻게 같은 집에 있었는데도, 바로 옆방에 누워 계셨는데도 일만 하고 벽을 통해 들려온 신음소리를 귀찮아하기만 했을까. 알고 계셨을 것이다. 나의 무관심, 경멸, 그리고 혐오.
그래서 돌아가신 이후로 단 한 번도 내 꿈에 찾아와 주지 않으신 것이다.
할머니가 우시는 것을 두 번밖에 본 적이 없는데, 그 중 한 번은 퇴원하신 지 며칠 됐을 때였다. 할머니 방에서 다툼 소리가 들려와서 또 아버지에게 화내셨겠지 싶고 들어가 보니 할머니는 울고 계셨고, 아버지는 어쩔 줄 모르고 옆에 서 있기만 하셨다.
“너 내가 곧 죽을 것 같아 가지구 딴 데로 떠나보내려고 안달이지?”
아버지가 난처한 표정으로 약간 무뚝뚝한 어투로 답하셨다.
“형네 집이 넓어서 거기서 지내시면 더 편하실 것 같을 뿐이에요.”
“편하다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가 여기서 죽을까 봐 지금 내쫓으려고 하는 거. 내가 모르는 줄 알아?”
그러곤 할 말이 없어 방을 나간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통곡하기 시작하셨다.
“인생 헛 살았구나, 내가. 자식 다섯이나 키웠는데… 어쩌다 이런 꼴이 됐나.”
나는 할머니 옆에 앉아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내가 이 집을 더럽힐까 봐 니 큰 아버지네 집에 가서 죽으라는 거지.”
“할머니!”
“내가 다 알아. 쓸모없는 사람이지, 나는. 몸이 망가졌으니 걷지도 못하고. 이제 진짜 폐인이 됐구나.”
나는 할머니가 서럽게 우는 옆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지만, 끝내 위로가 될 만한 말이 생각 안 나서 어깨를 토닥여만 드렸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한참 동안 할머니의 방을 못 들어갔다. 내 방에 들어갈 때마다 그 방을 지나가야 했는데, 그럴 때는 항상 앞만 보고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두려워서 그랬던 것 같다. 들여다보면 평소처럼 침대에 앉아 계실까 봐. 아니면 대신에 텅 빈 침대만 나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을까 봐.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괜찮아졌다. 어느새 아무렇지도 않게 할머니의 방을 드나들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할머니의 냄새가 배었던 침대와 옷장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분노, 슬픔, 그리고 아픔을 우려내고, 이제 남은 찌꺼기라고는 후회밖에 없다.
둘째 동생이 할머니 꿈을 자주 꾼다. 대부분은 좋은 꿈이지만 가끔은 화나시거나 뭔가가 모자라다고 투정하기도 하셨단다. 그럴 때는 나중에 청명절이나 제삿날에 챙겨드릴 수 있게 꼭 큰 어머니께 전해 드린다.
동생이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할머니가 둘째 동생을 제일 예뻐해 주셔서 그런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가족과 다르게 할머니 꿈을 꾼 적이 없다. 단 한 번도, 내 꿈에 찾아와 주지 않으셨다.
사실 딱 한 번 꿨다, 할머니 꿈을.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지하철역이었다. 간판이 어느 나라 언어로 되어 있었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외국 지하철역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인파에 떠밀려 가고 있는데 앞에 사람 몇 명을 사이에 두고 할머니가 걸어가고 계셨다.
“할머니!”
나도 모르게 소리내 할머니를 불렀지만,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기만 하셨다.
“할머니…?”
앞에 있는 사람들을 밀치고 할머니를 따라잡으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간격이 줄어들지 않는다.
어느새 개찰구에 도착하셨다. 개찰구를 통화하신 후 드디어 얼굴을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치셨다. 내가 알던 그 못마땅한 눈초리였고, 표정이 차가웠다.
“할머니…”
나와 잠시 마주보신 후 다시 뒤돌아서서 걸아가기 시작하셨다. 나는 허둥지둥 주머니를 뒤져 보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티켓이 없었다.
“가지 마세요, 할머니! 가지 마…”
인파 속으로 흔적없이 사라지시는 것을 나는 묵묵히 지켜 보았다.
I have no idea what was said here, but I’d just like to say how cool I think it is that you can write in three languages. I can speak Malay fluently but even then I can’t write well in it, l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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